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디난드 마젤란 (문단 편집) === 죽음 === 1521년 마젤란은 [[필리핀]]의 [[세부]] 섬에 상륙해 현지인과 교류해 식량과 물을 공급받고 [[가톨릭]]을 전파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게 무척 어려웠는데 일단 이미 필리핀에는 [[이슬람교]]를 선교하러 온 [[인도인]] 및 [[아랍인]] [[무슬림]]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몇백 년 전부터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들이 꽤 많았다. [[불교]], [[힌두교]]의 영향도 꽤 뿌리가 깊었다. 훗날 마젤란을 전사하게 만든 라푸라푸 부족왕도 무슬림이었고, 이 지역에는 오늘날의 [[민다나오 섬|민다나오]]에서 [[말레이시아]] [[사바(말레이시아)|사바]] 주의 북부에 이르는 [[술루 술탄국]]이라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도 있었다. 비단 필리핀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도서 지역에서 [[이슬람교]]는 상당히 널리 전파되어서 앞서 마젤란이 고문관으로 재직했던 [[테르나테]]도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였다. 세부 국왕인 라자 후마본은 부투안 국왕의 사촌이자 동맹관계에 있었다. 세부섬은 항구가 2개 있었고, 중부 [[비사야 제도|비사야]] 지역의 중심지이자, 필리핀 제도 중앙에 위치해 있어 북부 [[루손섬]]과 남부 [[민다나오]] 사이의 중계 무역로여서 나름 부유한 왕국이기도 했다. 특산품이나 물품 제조가 마닐라나 민다나오에 비해 별로 발달되지는 못했으나 중계 무역지여서 교통이 발달했고 바랑가이 부족 왕국치고는 금을 많이 보유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6세기 비사야 지역은 철제 갑옷을 다량 보유하였던 루손, 민다나오 국가들과 다르게 철이 부족하여 다양한 재료를 가공한 갑옷을 만들어 입었다. 16세기 스페인 기록에는 이러한 다양한 갑옷들이 상상 외로 단단하고 방어력이 높았다고 되어 있는데, 현재는 모두 썩어 남아 있지 않다.[* 12세기 [[비사야인]] 해적들이 [[송나라]]에서 해적 활동을 할 때는 문신은 했지만 갑옷을 안 입고 있었다. 400년간 많은 전쟁으로 발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6세기에 마젤란과 싸울 때 맨몸으로 싸웠다는 상상화들은 모두 허구이다. 막탄 전투를 설명하기에 앞서, 세부에서 있었던 사건은 당시 살아남은 각 생존자들의 증언이 일관되지 못하다. 왕실의 지원을 받은 원정을 실패한 만큼, 각 생존자들은 무언가 숨기는게 있었고 뒤늦게 발설한 내용(막탄 전투에서 마젤란 사망)도 많았으며, 이러한 내용들도 당시 스페인과 사이가 안좋던 [[프랑스 왕국|프랑스]]에서 변조가 이루어진게 많았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다양한 추측이 일어난다. 한가지 진실은 마젤란 원정 이후에도 스페인은 4번의 필리핀 정복 원정에 모두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는 [[아메리카]] 정복과 달리 꽤나 애먹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젤란은 포르투갈 방식을 따라[* [[콘키스타도르]] 몇 명이 [[철기 시대]] 이전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상대로 강철 칼과 군마, 화승총, 화포 등으로 무쌍을 찍으며 [[아메리카]]를 정복해나가던 스페인과는 달리, 포르투갈이 진출한 지역은 [[몰루카]], [[호르무즈]], 다만디우(Daman and Diu)등 이미 상당한 지역 행정조직을 갖춘 [[힌두교]], 이슬람계 술탄국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어 이런 식이 통하지 않아 지역 유지들과 친분을 쌓으며 점과 선을 장악하고 교역을 하는 방식을 택하여 실리를 챙겨왔다. 그렇게 만든 전진기지가 인도의 [[고아 주]]와 [[명나라]]의 [[마카오]] 등이었다.], 지역 통치자와 친밀관계를 형성하고 그의 정적을 제거함으로써 지역의 호응을 얻고자 하였다. 그래서 우선 세부 섬에서 통합국을 다스리던 국왕 라자 후마본과 의형제 관계를 형성하고, 막탄 섬 지배를 두고 경쟁하던 막탄 섬 부족연합 촌장인 [[라푸라푸]](Lapu-Lapu)를 죽이겠다고 약속했다. 사실 라푸라푸 촌장은 힌두교, 불교계인 라자 후마본과 달리 무슬림이었다. 즉, 자신이 속한 왕국의 국왕과 다른 종교를 믿고 있었다. 필리핀은 왕권이 낮은 상업 봉건제였고 대규모 침략을 당하거나 각자의 이익이 하나로 일치된 전투가 아닌 이상, 군사동원력 또한 일반적인 전투에서는 영 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6세기부터 필리핀 제도는 인도 계통의 세력들과 이슬람계 세력들이 무역으로 협력, 공존하면서도 세력다툼이 일어나는 양상이 지속되고 있었다. 마젤란은 라푸라푸를 조그만한 막탄 섬의 소영주이니 쉽게 이길 것이라고 오판하였고, 첫번째 전투에서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스페인인]] 60여 명과 [[세부]]인 200~300명이라는 소수 병력만 이끌고 갔다. 그렇다고 마젤란이 닥치고 쳐들어간 것은 아니고 먼저 세부인을 사신으로 보내 항복과 같이 라자 후마본의 막탄 섬 지배를 인정하고 스페인 국왕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다. 물론 무슬림이었던 라푸라푸는 비웃음과 함께[* 특히 마젤란의 요구가 사실상 협박이었기에 라푸라푸를 화나게 만들었다.] 요구에 대해 세부인 사신을 두들겨 패서 보내는 것으로 답변했다. 그리고 부족들에게 전투 준비를 지시했다. 이렇게 비상령을 걸고 준비했거늘, 소수 병력을 이끌고 막탄 섬으로 쳐들어오니 해안에서 마젤란의 예상과 달리 준비되어 있는 1,500여명의 전사들과 맞닥뜨리고 만다. 결국 병력 수에서 불리한 이들은 압도적인 수의 라푸라푸 군대에게 참패했고 마젤란은 끔살당했다. 라푸라푸 측의 사상자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젤란은 퇴각 와중에 무거운 갑옷과 불편한 무릎 때문에 뒤쳐지고 말았고, 하필 다친 무릎에 다시 부상을 입어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라푸라푸 군대는 침략자들이 총과 화살을 쏴대는 것에 일부 병력이 죽거나 다치는 걸 보고 거리를 두고 떨어져 화살과 돌을 던져댔다. 스페인 원정대는 화약이 바닥나서 적들이 내던지는 돌에 압도당했다. 그나마 이들은 단단한 투구와 갑옷으로 돌팔매질을 버텼다. 하지만 라푸라푸 군대는 이걸 보고 저들 침략자들이 장거리 무기가 이젠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몰려와서 이들을 공격하며 투구와 갑옷이 보호하지 못하는 다리를 집중 공격했다. 결국 마젤란은 명성에 비해서는 결코 곱지 못한 최후를 맞았다.] 원주민군의 창과 검에 끔살된데다 원주민들 측에서 시신을 돌려주지 않아 시체마저 수습하지 못했다. 몇 번의 전투가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그것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피가페타의 기록에 따르면 원주민 촌장 라푸라푸에게 원하는 만큼 재물도 주고 수습할 테니 시신을 인계해 달라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하며 라푸라푸가 오히려 [[고인능욕|그의 시신을 전승 기념물로 사용하였다.]] 피가페타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적들은 모두 마젤란에게 달려들었다. 적들 중 한 사람이 크기만 조금 큰 [[언월도]]와 비슷하게 생긴, 칼몸이 흰 넓적한 장검으로 마젤란의 왼쪽 다리를 베었다. 그 공격에 마젤란은 앞으로 고꾸라졌고, 적들은 철창과 [[죽창]], 칼몸이 흰 넓적한 칼로[* '캄필란' 이라고 하는 필리핀 전통 무기이며 특징은 생물의 벌어진 입을 묘사하느라 갈라진 칼자루 디자인이다. 필리핀의 전통 무술 [[칼리 아르니스]]에서 쓰이는 무기이기도 하다.[[https://www.google.com/search?q=Kampilan&source=lnms&tbm=isch&sa=X&ved=0ahUKEwjGkPbNu-TlAhXSKqYKHcwzCeYQ_AUIEigB&biw=1920&bih=937#imgrc=KcunMHCz_awC5M:|이미지]]] 마젤란에게 달려들어서 우리의 거울이자, 빛, 위안을 주는 사람이자 진정한 안내자를 죽였다." 마젤란 자신은 비명에 죽었으나 마젤란이 이끌던 [[선박]]들은 항해를 계속해 결국 세계 일주에 성공했다. 필리핀은 [[유라시아]] 지역권에 속했고, 이미 나머지 귀항로는 이전에 포르투갈이 개척했던 항로였기 때문에 본국까지 비교적 수월하게 도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본국에 돌아온 사람은 총 18명, 남은 배는 1척이었다. 마젤란의 충직한 노예이던 엔리케[* 일부 사람들은 엔리케가 처음으로 세계 일주에 성공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엔리케는 필리핀 출신이었고, 마젤란과 함께 항해에 참가해 필리핀으로 돌아온 셈이기 때문. 물론 정설은 아니고 일종의 야사에 가까운 이야기이다.][* 이 엔리케라는 자는 주인에게 상당한 신임을 받았는지, 마젤란과 고급선원들의 식사나 회의자리에 동석하고 함 내에서 약간의 지휘권도 갖는 등의 우대를 받았다고 한다. 마젤란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면 주인을 잘 지키지 못한 선원들에게 원한을 품었을지도 모른다.]는 마젤란이 죽은 이유가 선원들이 멍청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마젤란의 목숨값을 받아내기 위해(!!) 세부의 술탄을 충동질하였고, 술탄의 식사 초대에 아무 생각 없이 응한 많은 베테랑 선원들이 독살당하여 불귀의 객이 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남은 선원들도 공격받아 겨우 탈출했다. 탈출한 다음 모아보니 배 세척을 운용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고, 결국 콘셉시온에 불을 질러 자침시키기에 이른다. 이렇듯 엔리케와 엘카노의 주장이 각각 다르고, 각 생존자들의 증언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진실을 알기 어렵다. 남은 두 척의 배 [[트리니다드]]와 빅토리아는 항해를 계속하여 목적지인 몰루카 제도[* 다른 말로는 향료 군도.]의 티도르 섬에 상륙했다. 티도르 왕의 비호 속에서 대량의 향신료를 싣고 이제 귀향길에 오르려는 순간, 이번에는 마젤란 함대의 기함이었던 트리니다드의 함체가 오랜 항해로 파손되어 항해가 불가능해졌다[* 정향을 잔뜩 싣고 출발하려는 순간 침수가 발생했다. 결국 수리기간이 4개월이 걸렸다. 출항 후에도 풍랑과 괴혈병이 덮쳐 제대로된 항해를 하지 못하고 마젤란을 추적하던 포르투갈 함대에 나포되어 단 3명의 선원만 스페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결국 트리니다드 호는 티도르 섬에 남았고, 마젤란 함대에서 가장 작은 배였던 빅토리아만이 스페인으로의 귀환길에 오른다. 그런데 이 귀향길도 고난의 항로였다. 애초에 마젤란이 동쪽이 아닌 서쪽을 택한 이유가, 귀항로가 '''[[포르투갈 제국]] 영역이기 때문'''이다. 항로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뇌물로 적재한 향료를 뿌려대 식량을 교환했다. 다행히 인근 원주민들은 적대적이지 않아서 교역은 성공적이었고 항해하기에 충분한 식량과 물을 얻을 수 있어 식량 문제를 해결했다. 함대가 스페인을 출발한 지 3년 만인 1522년, 마젤란 함대 중 빅토리아 호 단 1척[* 빅토리아의 뜻('''[[승리]]''')을 생각해 보면 이름값을 한 셈이다.]과 18명의 선원만이[* 1)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선장), 2)프란시스코 알보, 3)미구엘 데 로다스, 4)후안 데 아쿠리오, 5)안토니오 롬바르도(=피가페타), 6)마르틴 데 후디키버스, 7)에르난 데 부스타만테, 8)그리스인 니콜라스, 9)미구엘 산체스, 10)안토니오 에르난데스 콜메네로, 11)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 12)후안 로드리게스, 13)디에고 카르메나, 14)아첸의 한스, 15)후안 데 아라티아, 16)바스코 고메즈 갈레고, 17)후안 데 산탄드레스, 18)후안 데 주빌레타.] 최초의 세계 일주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스페인으로 돌아온다. 배 3척[* 산티아고 호, 콘셉시온 호, 트리니다드 호를 가리킴. 산 안토니오 호는 전술했다시피 중도에 이탈.]이 침몰하고 250여 명의 선원을 잃었지만, '''빅토리아 호 한 척에 실린 향료만으로 모든 항해 비용을 상쇄하고도 이윤이 남았다.''' 왜 유럽인들이 아시아와의 무역에 그렇게 집착했는지를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항해한 거리는 약 '''54,000 km''' 로 , 지구를 1.3바퀴 정도 도는 거리이다. 마젤란의 업적이 이후 생존한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와 칼바리요에 의해서 증거가 인멸되었다가 [[안토니오 피가페타]](Antonio Pigafetta, 1491~1534)가 자신의 고향인 베니스로 돌아간 후 이 기록을 '최초의 세계 일주에 대한 기록(Relazione del primo viaggio intorno al mondo)'이라는 책[* 이 책이 완전히 출판된 것은 18세기 이후이다. 그 전에는 책의 일부분만 출판된 기록이 남아 있으며 그나마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프랑스어 판본으로 여러차례 변조가 이뤄졌다는 평가를 받는다.]으로 엮었기 때문에 극적으로 마젤란의 행적이 알려질 수 있었다. 다만, 피가페타 이외에 다른 선원에 의해, 혹은 스페인 왕실에서 기록한 것들도 존재한다. 상술했듯 증거들이 인멸되고 이야기가 각색되는 말들이 있는 등 당시 원정대 안에서 무슨일이 벌어 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살아남은 생존자들도 그 지옥같은 상황속에서 무슨 짓을 해서 돌아온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우선 칼바리요라고 알려진 인물은 마젤란 사후 세계 일주 함대의 함장이었다가 트리니다드 호가 고장나자 티도르 섬에 남은 인물이다. 칼바리요가 콘셉시온 호를 불태운 것이 증거인멸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나 신빙성이 낮다.[* 엘카노가 마젤란 해협에서 도주한 배의 선장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실제로 마젤란 해협에서 돌아간 배는 산 안토니오 호이고, 그 배의 선장은 메스키타라는 스페인 항해사이며 실제로 스페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선장을 설득한 인물은 항해장이었던 포르투갈인 에스테반 고메즈이다. 산 안토니오 호가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길에 섬들을 발견했다고 하는 곳이 일명 산 안토니오 제도 혹은 스페인어로 말비나스 제도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현대의 [[포클랜드 제도]]이다.] 두번째로 엘카노는 마젤란의 공적을 축소한 적이 없다. 스페인 왕실 서기였던 막시밀리안 트랜실바노가 엘카노 외 3명을 조사한 기록에 의하면 엘카노는 피가페타보다 반란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서술했으며[* 마젤란파였던 피가페타는 오히려 포르투갈인었던 마젤란과 스페인 항해사의 대립에 대해서 약간 두루뭉술하게 넘긴 흔적이 있다.] 항해에 대해서도 뚜렷하게 행적을 밝혔다. 애초에 다른 기록을 모조리 없앴다고 하는데 생존자들이 남긴 기록중에서는 빅토리아호의 항해사였던 프란시스코 알보의 항해 일지까지 남아 있었다. 이 기록들은 피가페타의 기록보다 먼저 작성되었지만, 피가페타의 기록만큼 널리 알려지지 못했을 뿐이다. 오히려 엘카노는 마젤란이 모함을 받았다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노력했다. 다만 엘카노는 이 과정에서 마젤란이 왜 죽었는지, 그리고 선원들이 어떤 방탕한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 숨기려고 해서 그 신빙성을 스스로 깎아먹는 결과를 낳기는 했다. 마지막으로 엘카노가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인물이라고 불린 것은 근거가 없는게 아니다. 오히려 최초의 세계 일주 후보인 엔리케, 엘카노, 마젤란 중에서 마젤란의 입지가 가장 떨어진다. 셋을 비교하면 이렇게 된다. * 말라카의 엔리케: 원래 필리핀 출생으로 인도 뱡향을 통해 유럽으로 떠났고, 태평양쪽으로 돌아왔다. 문제는 엔리케의 고향은 말라카인데, 필리핀은 말라카보다 동쪽이다. 세부에서 활동한 이후 엔리케의 행적은 알 수 없다. * 마젤란: 포르투갈에서 활동하던 시절 몰루카 제도의 암본섬에 온 적이 있고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갔다가 총함장이 되어서 태평양 쪽에서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경도상 [[암본]] 섬은 마젤란이 죽은 막탄섬보다 동쪽'''이다. * 엘카노: 마젤란 사후에도 살아서 남은 선박을 지휘해서 기타 17인과 함께 스페인으로 귀환했다. 마젤란의 경우 엔리케보다는 다소 유리하다. 마젤란이 유럽에서 가장 동쪽으로 이동한 곳과 스페인에서 출발하여 죽을 때까지 이동한 지역이 경도상으로는 지구 한 바퀴가 되기는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말라카에서 포르투갈까지 동쪽으로 절반, 스페인에서 필리핀까지 절반해서 한 바퀴이다. 그리고 스페인에서 필리핀까지의 항해를 마젤란이 지휘했다는 것도 강점이다. 문제는 마젤란의 세계 일주는 경도상으로는 그렇다라는 것이다. 마젤란은 출발점에 도착하지 못했다. 마젤란은 이전에 필리핀까지 간 적이 없기 때문에 마젤란의 항로도는 일생을 기준으로 잡아도 닫힌 선이 되지 못한다. 간단히 말해서 S자의 동쪽 끝 필리핀과 서쪽 끝 몰루카 제도 사이의 중간 선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엔리케의 세계 일주가 언어적이라면, 마젤란의 세계 일주는 수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엘카노의 경우는 엔리케와 마젤란에 비해서 독특한 장점이 있는데, '''한 번의 항해를 통해서 출발한 곳으로 돌아온''' 최초의 세계 일주를 한 18인의 대표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최초의 세계 일주를 한 사람은 엘카노를 포함한 18인으로 꼽는게 일반적이다. 마젤란이 아니다.] 마젤란과 엔리케의 경우는 한번의 항해라고 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항해를 후원한 스페인 입장에서는 도중에 사망한 마젤란보다는 생존한 엘카노를 최초의 세계 일주를 한 인물로 인정하는게 당연했다고 할 수 있고[* 막말로 항해가 성공한 것은 엘카노가 이끌고 온 빅토리아 호가 향료 제도라고 불린 몰루카 제도에서 사온 향료 때문이었다. 몰루카 제도는 이미 알려져 있던 지역으로, 다만 이 지역이 포르투갈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을 뿐이다. 결국 이 항해의 이득은 이 향료 대금에서 나왔다.], 마젤란의 입지가 엄청난 지금도 엘카노는 스페인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다.[* 현재 [[스페인 해군]] 해사생도 훈련함(기범선) 이름이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 함이다. 한국 해군사관학교도 몇 년에 한 번씩 방문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